감정 표현 불능증, 즉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는 1970년대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이다. 아동기에 정서 발달 단계를 잘 거치지 못하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 혹은 선천적으로 편도체(주: 감정을 느끼고 기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몬드 모양 뇌 영역)의 크기가 작은 경우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는 감정 중에서도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
『아몬드』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 윤재가 6세에 겪은 사건은 알렉시티마가 가진 잔혹한 현실적 무게를 드러낸다. 집단 폭행으로 중학생이 쓰러진 상황에서도 윤재는 차분히, 마치 사소한 사실을 전하듯 구멍가게 아저씨에게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그의 태연한 말투는 오히려 진실을 거짓으로 만들었고, 결국 쓰러진 중학생이 죽음에 이르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죽은 아이가 구멍가게 아저씨의 아들이었다는 점이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는 결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진지함이 결여된 알림을 한 죄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사회적 오해와 단절을 감수해야 했다. 이 장면은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의 냉혹함을 상징한다. 윤재의 할머니가 “사람들은 원래 남과 다른 걸 배기지 못하거든”이라고 말한 대목은 장애를 가진 이들이 겪는 낯섦과 차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몬드』는 윤재라는 특별한 인물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다름’을 배제하고 낙인찍는지 보여준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의 시선은 때로는 차갑게 보이지만, 그 차가움은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지 무관심이 아니다. 결국 공감이란 상대가 느끼는 방식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윤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정의 유무보다 중요한 것이 ‘다름을 받아들이는 태도’임을 일깨워준다. 그가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로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익숙한 방식으로만 공감을 정의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국 이 소설은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허물고, 우리 모두가 ‘다른 존재’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공감은 단지 타인의 감정을 읽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다름을 껴안고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이자 사회적 학습의 산물이다. 『아몬드』는 이러한 메시지를 극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우리 사회가 ‘차이’를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바로 이 점에서 『아몬드』는 단순한 성장 서사에 머물지 않고, 공감과 타자 이해에 관한 사회 문화적 비평으로 읽힐 수 있다.